"약관 9조의 '입원'은 외래 진료도 포함되는 것 아닌가요?" 청구 거절 통지를 받은 고객이 설계사에게 묻는다. 같은 문장을 보험사는 '24시간 입원'으로 읽고 고객은 '주간 입원'까지 포함된다고 읽는다. 둘 다 그럴듯하다. 이때 법은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약관의 뜻이 끝까지 명확하지 않으면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한다. 이걸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약관규제법 제5조 제2항이 정한 법리이고, 대법원이 수십 년간 일관되게 적용해 온 원칙이다. 알아두면 청구 거절·삭감 분쟁에서 설계사가 고객 옆에 설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무기가 된다.
핵심 한 줄: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은 '모든 해석 원칙을 다 적용한 뒤에도 약관 뜻이 명확하지 않을 때' 비로소 적용되는 보충적 원칙이다. 모호한 약관 = 무조건 고객 승소가 아니다. 이 보충성 구조를 알아야 분쟁 현장에서 실수 없이 활용할 수 있다.
1.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이란 무엇인가
약관규제법(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 제5조 제2항은 이렇게 적고 있다.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보험계약은 보험사가 미리 작성한 약관을 고객이 받아들이는 부합계약이다. 약관 한 문장도 고객이 협상해서 바꿀 수 없다. 이 '교섭의 불평등'을 메우기 위해 법은 작성자에게 불이익을 지운다.
영미법에서는 같은 법리를 '콘트라 프로페렌템(Contra proferentem)'이라 부른다. 라틴어 그대로 '작성자에게 불리하게'라는 뜻이다. 약관·계약서를 만든 쪽이 모호함의 책임을 진다는 발상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다.
한 가지 오해부터 정리하자. 이 원칙은 "보험사가 약관을 썼으니 분쟁은 무조건 고객이 이긴다"는 룰이 아니다. 약관 문언이 평균적 가입자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명확하다면 그대로 해석한다. 다툴 여지가 없으면 적용 자체가 안 된다. 이 보충성 구조가 핵심이다.
2. 적용되는 4가지 요건
대법원 판례 흐름과 한국보험연구원(KIRI) 연구보고서(2022, '보험약관 해석 원칙에 관한 연구' 계열, kiri.or.kr 자료실 공개)는 작성자 불이익 원칙의 적용 요건을 대체로 다음 4가지로 정리한다. 분쟁 현장에서 이 체크리스트를 머릿속에 띄워두면 길을 잃지 않는다.
약관 문언이 다의적일 것
한 조항이 객관적으로 두 가지 이상의 의미로 읽힐 수 있어야 한다. 단순 오타나 한 가지 해석만 가능한 문장은 대상이 아니다. 약관 9조의 '입원'처럼 가입자 시각에서 둘 다 그럴듯한 해석이 나와야 출발선이 그어진다.
각 해석이 모두 합리성을 가질 것
다의적이라 해도 한쪽 해석이 명백히 비합리적이면 적용되지 않는다. 평균적 가입자가 약관을 읽었을 때 양쪽 모두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해석이어야 한다.
다른 해석 원칙을 모두 적용해 봤을 것 (보충성)
신의성실, 약관 전체 맥락, 평균적 고객 이해 기준, 객관적·획일적 해석 — 이 모든 원칙을 적용해 본 뒤에도 의미가 정해지지 않을 때 비로소 작성자 불이익 원칙이 들어선다. 가장 마지막에 꺼내는 카드라는 뜻.
고객에게 유리한 방향이 명확할 것
'고객에게 유리'가 무엇인지 정해져야 적용이 가능하다. 보험금 청구 사건에서는 대개 보장 인정·면책 부정 방향이지만, 사건 구조에 따라 무엇이 유리인지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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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법원이 가르는 적용 vs 비적용
제가 상담했던 50대 자영업자 고객 사례. 척추 시술 후 보험금 청구를 했는데, 보험사가 '약관상 입원은 24시간 이상 입실'이라며 일부 거절했다. 영수증에는 '입원'으로 적혔는데 실제 체류는 18시간. 고객은 분통을 터뜨렸다. "여기 영수증에 입원이라고 써 있잖아요." 이 사건은 결국 약관 문언과 의료기관 기록의 차이라는 사실관계 다툼으로 가면서 작성자 불이익 원칙까지 가지 못했다. 그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 끝나는 사건이 의외로 많다.
대법원은 적용 여부를 어떻게 가를까. 최근의 대표적 흐름을 사례별로 보자.
적용된 경우
약관 조항이 다의적이고 다른 해석 원칙으로 정리되지 않은 경우, 대법원은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해 왔다. 대법원 2018. 7. 24. 선고 2017다256828 판결, 대법원 2018. 6. 28. 선고 2018다203395 판결 등이 종종 인용된다. 약관 문구가 평균적 가입자 입장에서 두 갈래로 읽힐 여지가 명확하고, 보험사가 그 의미를 사전에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정황이 함께 인정된 류의 사건들이다. 각 판결의 구체적 쟁점과 결론은 대법원 종합법률정보(glaw.scourt.go.kr) 또는 국가법령정보센터(law.go.kr) 원문을 직접 확인하시기 바란다.
적용되지 않은 경우
약관 문언이 평균적 가입자 기준으로 충분히 명확하면, 이 원칙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예컨대 약관이 '병리학적 진단에 의한 암 진단 확정'을 원칙으로 명시하고 있다면, 양성 종양을 보험금 지급 사유에 포함시키는 해석은 문언의 객관적 의미를 벗어난다는 판단 흐름이 있다. 최근에도 입원의료비 담보 특약 해석에서 작성자 불이익 원칙의 적용 한계를 정리한 대법원 판례(2024. 10. 31. 선고 2023다240916 등)가 인용된다. 다만 개별 판례의 정확한 사건명·쟁점·결론은 시점·상품·약관 버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실제 사건 적용 시에는 반드시 원문과 전문가 검토를 거쳐야 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약관이 진짜로 모호하면 고객 쪽으로 기운다. 약관이 명확하면 — 고객 입장에서는 아쉽지만 — 그 문언대로 간다. 분쟁 현장에서 설계사가 가장 먼저 점검할 것은 '이 약관이 정말 다의적인가'다. 본 가이드는 일반 정보 제공 목적이며, 구체적인 판단·해석은 변호사·손해사정사·금융감독원 분쟁조정 절차의 영역이다.
4. 설계사가 분쟁 옆에 설 때의 4단계 동선
청구 거절·삭감 통지를 받고 당황한 고객 옆에서 설계사가 챙길 수 있는 동선을 단계별로 정리하면 이렇다. 판단을 대신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실관계를 정리해서 전문가에게 넘기는 자리라는 점이 핵심이다.
거절·삭감 사유를 약관 조문까지 추적
보험사 거절 통지서에는 통상 약관 몇 조 몇 항이 근거로 적힌다. 그 조문 원문을 약관집에서 찾아 인쇄해 둔다. 원문 한 줄을 손에 쥐어야 다툼의 출발점이 잡힌다.
두 갈래 해석이 가능한지 평균적 가입자 시각으로 점검
법학 지식 없는 일반 고객이 그 문장을 읽으면 보험사 해석으로 읽힐 가능성과 다른 해석으로 읽힐 가능성이 모두 합리적인가? 양쪽이 다 그럴듯하다면 작성자 불이익 원칙 적용 후보가 된다. 한쪽 해석이 비합리적이면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설명의무 위반 여부 동시 점검
약관 해석 다툼 옆에는 보험업법 제95조의2 설명의무 위반 쟁점이 함께 가는 경우가 많다. 가입 당시 해당 조항의 의미·예외·면책 사유를 명확히 안내받지 못했다면, 약관 해석과 별개로 설명의무 위반으로 면책 자체가 제한될 수 있다. 청약서·상품설명서·녹취 등 가입 단계 자료를 함께 보관해 둔다.
금감원 분쟁조정·손해사정사·변호사로 연결
준비된 자료를 들고 금융감독원 금융분쟁조정위원회, 손해사정사, 보험전문 변호사 중 사건 성격에 맞는 채널로 연결한다. 분쟁조정 절차의 비용·효력·소요 기간은 신청 시점 기준 금융감독원 e-금융민원센터(www.fcsc.kr)와 금융소비자 보호 관련 공식 안내를 확인해야 한다. 설계사는 사실관계 정리자이지 판단자가 아니다. 이 선을 분명히 지키는 게 신뢰의 절반.
5. 현장에서 자주 빠지는 함정 3가지
함정 1. "모호하니까 무조건 우리가 이긴다"는 단정
가장 흔한 오해. 작성자 불이익 원칙은 보충적이다. 다른 해석 원칙으로 의미가 정해지면 그 단계에서 끝난다. 고객에게 "이 약관 모호해서 100% 이길 수 있다"고 단정하는 순간, 사건이 반대로 가면 설계사 신뢰는 바닥난다. 가능성이 있다는 안내까지가 설계사 영역이다.
함정 2. 보험사 거절 통지서만 보고 판단
거절 통지서에는 보험사 측 해석만 적힌다. 약관 원문, 상품설명서, 청약 당시 안내 자료까지 묶어서 봐야 다툼의 윤곽이 보인다. 한 줄짜리 통지서로 사건 전체를 판단하면 놓치는 게 많다.
함정 3. 설계사가 직접 보험사와 다투기
고객 마음은 이해되지만, 설계사가 직접 약관 해석으로 보험사와 각을 세우는 건 위험하다. 사건이 길어지면 설계사 본인의 위촉 관계, 영업 활동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사실관계 정리는 설계사가, 해석 다툼은 손해사정사·변호사가, 결정은 금감원·법원이 — 이 역할 분담이 가장 안전하다.
6. 마무리 — 약관 한 줄의 무게
보험은 결국 종이 한 장의 약속이다. 그 종이의 한 줄이 모호할 때, 누가 그 모호함의 책임을 질까. 법은 "쓴 사람이 진다"고 답한다. 단, 정말 모호할 때만. 이 단서가 작성자 불이익 원칙의 정확한 모습이다.
분쟁 한가운데 선 고객에게 설계사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안은 정답이 아니다. "이런 원칙이 있고, 이런 절차로 다툴 수 있다"는 지도다. 그 지도를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객은 덜 외롭다. 모집 단계의 신뢰만큼 사후관리 단계의 신뢰가 중요하다. 약관 한 줄의 무게를 함께 견뎌주는 설계사가 오래 남는다.
오늘 통지서 한 장을 받은 고객이 있다면, 통지서만 읽지 마시라. 약관 원문부터 찾아 함께 펴 보시기를.